리스본에서 살 집을 알아보면서 깜짝 놀란 사실이 하나 있다.
아파트들의 연식이 1970년대 지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내가 알아본 지역이 부촌 쪽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부촌 쪽에 가도 새로 지은 아파트들은 그리 많지 않다.
리스본 자체가 오래된 도시이고 재개발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대대적인 재개발은 거의 없고 그냥 기존의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는 수준이다.
이런 50년 이상된 아파트 내부를 리모델링해 놓은 아파트가 신축아파트축에 속한다.
예전의 아파트들을 보면 꼭 있는 것이 부엌방과 빨랫줄, 그리고 구식 비데변기이다.
부엌의 경우 요즘에는 오픈 스페이스가 유행이라서 거실과 부엌을 오픈하여
공간을 크게 쓰지만, 리스본의 예전 아파트들은 작은 방에 부엌이 있다.
그곳에 작은 식탁을 놓고 식사를 하거나 거실에 메인 식탁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주로 부엌창 너머로 그 유명한 포르투갈 빨랫줄이 설치되어 있다.
사실 외국사람들은 집밖으로 빨래 너는 것을 싫어해서 파리같은 경우
법으로까지 금지하고 있다는데 포르투갈 사람들은 일광건조를 포기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햇살이 좋은 날엔 정말로 한나절만 말려도 뽀송뽀송한 건조를 맛볼 수 있으니
건조기에 비할 바가 아니긴 하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빨래대를 설치하고 그 앞을 가림막으로 막은 것이다.
빨래는 널되 자질구레한 느낌은 덜고자 한 것 같다.
문제는 나처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널 때마다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공포를 느낀다는 건데, 그냥 최대한 몸을 낮추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가까운 곳에만 몇 개
너는 것으로 만족하곤 한다.
유럽식 비데변기는 아직도 오래된 아파트에는 꽤 많이 설치되어 있어서 에어비앤비 같은 곳에서도
자주 볼수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처음에는 사용법을 당최 알 수 없었고 어찌어찌해서 사용법을 알게 된 후에도
사용해 볼 마음은 별로 생기지 않던 물건이다.
어렸을 적부터 적응을 한 사람이 아닌 이상 이 물건에 새롭게 적응하긴 쉽지 않아 보였고
그래서 새로 구할 집에서도 이 비데는 없었으면 했다.
쓰지도 않는데 공간은 꽤나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요즘 리모델링 하는 집들은 이 비데변기를 거의 설치하지 않는 추세이다.
그렇게 여러 우여곡절 끝에 새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집도 70년대 지어졌고, 집에서 엘베를 호출하던 한국의 새 아파트랑은 비교도 할 수 없는
가끔 괴물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오래된 엘베가 있고,
한 층에 네 집이 옹기종기 붙어있는 그런 집이다.
처음 이사를 와서 가장 걱정이었던 것은 층간소음이었다.
1970년대 지어진 아파트의 층간소음은 어떨까.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층간소음에 어떻게 대처를 할까.
결론은, 아무도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사 온 첫날, 나는 밤 10시가 되었는데 드르륵 거리는 기계음을 한 30분 정도 들었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오래된 아파트는 벽이 두꺼워서 층간소음이 없다더니 그것도 아니네.
그리고 새벽쯤에 어느 집에서 음식물 쓰레기처리기를 돌렸다.
이 시간에 뭘 먹고 자려는 건가. 아님 출근을 이렇게 빨리 하는 건가.
4시 10분이 되자 옆집 아저씨의 기침소리가 한 10분쯤 이어졌다.
그렇다. 네 집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탓에 층간소음보다 벽간소음이 더 심했다.
옆집 티비소리, 말소리가 너무도 잘 들렸던 것이다.
결국, 난 이 아파트의 모든 가족을 품기로 했다.
이 아파트라는 대가족 속으로 이사를 왔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이 집에서 즐겁고 활기차게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하자.
새벽 4시에 기침을 하시는 옆집 아저씨의 쾌차를 빌어드리고,
10시 넘도록 떠들고 있는 어느 집의 파티를 마음속으로 같이 즐기자.
나 역시, 한국에 영상통화를 할 때 목소리가 어느 집까지 울리는지 알 수 없으니.
신기한 것은 그런 소음들은 다 단발성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한두 번 들렸다 말지 여러 날 반복되지는 않는다.
내가 신경을 쓰지 않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지만 그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면 내 삶 역시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나는 50년 된 아파트와 친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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